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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잊어야 할까?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잊어야 할까?>

새벽3시가 조금 넘어 눈을 떳다.
다시 자야해~ 스스로 최면을 걸며 100부터 1까지 거꾸로 세어보기도 하고 뒤척이다 일어나 책상앞에 앉았다.

聖經-論語-小學-島山
이렇게 네 권의 책과 ‘콕콕 찍어주마~’로 시작하는 N1일본어능력시험이 책상위에 놓여져있다.
요즘 논문과 관련한 사료를 검토하면서 틈나는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일본어공부와 잃어버린 한자어와 한문공부를 위해 어린시절 공부했던 論語와 小學을 본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처음 기독교에 입문할 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참 많이 비슷하다. 뭐가 진짜일까?”
사실 나의 지적인 탐구와 의심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미치지 않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만 기억하는데 데카르트가 했던 말이다.
병약하게 태어나서 골골거리다 일생을 마친 그이지만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심했던 의심돌이의 대부랄까?
나는 그런 데카르트가 좋다.
의심병도진 도마랄까?

마태복음16:24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유학에서는 삶의 지극한 경지에 이름을 달생達生이라고 표현한다.
시쳇말로 잘 사는 것을 ‘달생’이라고 하는 셈이다.
장자는 삶을 지극하게 잘 사는 사람은 지인至人이라고 불렀다.
니체에게 있어 초인超人은 인간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존재다.
그래서 니체는 서양의 제도적 신은 죽었고 초인이 와야 한다고 썰을 풀었다.
하지만 장자는 거의 2500년이나 앞서 백성을 힘들게 하는 제도적인 인의를 버리고 지인을 따라야 한다는 철학을 이야기로 남겨두었다.
니체가 초인을 통해 인간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장자는 단지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지인은 누구일까?
장자에 따르면 자기를 잊어버린 사람이다.
자연을 따르고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 이것을 순망順望이라고 한다.
순망의 존재=지인인 셈이다.
니체의 초인은 이러한 순망으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힘으로 믿고 인간의 실존을 성취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장자의 지인은 가르치는 것을 하지 않고 다만 순망할 뿐이다.
인간의 의지는 인간의 욕망과 야합하여 탈이 된다.
굳이 따진다면 내가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을 인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욕망과 야망의 덩어리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잊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장자는 세상의 인간에게 무위無爲가 커다란 고통이라고 말했다.
달리 표현한다면 순망이 무위를 누리는 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인至人은 무위에 이른 길을 걷는 존재일 것이다.

잘 사는 건 뭘까?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잊어야 할까?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너무나 많은 것을 먹고
너무나 많은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대문명의 이기로 인해 몸은 편한데 단지 몸만 편할 뿐, 마음이 불편한 삶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다.
어쩌면, 그 속깊은 마음의 불편함도 감지하지 못한 채 영적인 문둥병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말씀과 장자의 이야기는 서로 맞닿아있다.
논어의 <達生편>에 등장하는 관윤關尹, 매미를 잡는 꼽추, 안연顏淵을 혼내준 뱃사공과 같은 인물들은 그런 달생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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