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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설민석논란에 대해

인터넷 역사강사로 잘 알려진 설민석이라는 사람이 있다.
'역사의 대중화'라는 긍정적인 면을 고려하더라도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싶다.
초판이 15만부를 찍었다는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을 서점에서 훑어봤지만 선조를 '조선을 버린 임금'으로 깍아내리고, 고종을 폄훼하는 장면에서 역사를 강의하는 이로서 중립적이지 못한 시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역사인강분야의 소위 스타강사로서의 입지와 '어쩌다 어른'과 같은 TV프로그램을 통한 인지도를 고려한다면 그의 발언과 글은 아쉽기만 하다.

최근 민족대표33인에 대한 그의 강의내용과 발언이 화제?다.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과 그를 바탕으로 한 역사의식은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생성시키고 발전시킨다고 볼 때, 대한민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임시정부와 일제항일독립운동의 출발점인 3.1운동과 관련한 그의 견해는 우려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문제가 되는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룸살롱인 태화관에서 낮술을 마시며 술판을 벌렸고, 손병희는 태화관 마담 주옥경과 사귀었다. 그리고 민족대표33인 대부분은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3.1운동을 통해 수많은 청년과 학생들이 시위를 통해 죽어갈 때 그들은 일제에 자수를 하였다"

문제가 되자 SNS를 통해 설민석은 "저는 학계의 비판적 견해를 도서·강연에 반영했고 그날 그 장소, 그 현장에서의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 입장을 갖고 있다”며 “하지만 그것은 그날, 그 사건에 대한 견해일 뿐이지 민족대표 33인을 헐뜯으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어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 당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후 자발적으로 일본 경무 총감부에 연락해 투옥된 점과 탑골공원 만세운동 현장에 있지 않은 점, 만세운동을 이끈 것은 학생과 일반 대중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다양한 평가가 있다”고 강의중 논란이 된 발언한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할 점은 과연 그의 주장이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고 있는가?하는 점과 '사실(팩트)'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SBS 이성훈기자에게 메일을 보내 2001년에 정치외교사를 전공한 교수가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근거로 '룸살롱' 표현을 사용하였고, 문제의 '술판'에 대한 표현 역시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태화관'에서 일제히 축배를 들고... 라는 표현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SNS나 정식 입장문에서는 빼버린다.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결국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33인 후손들로부터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게 된다.

결국, 설민석의 주장은 그의 말처럼 일부의 '비판적인 시각'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그 일부의 주장을 인터넷강의를 통해 일반에게 설파하기엔 부적절하다고 하겠다. 더 큰 문제는 그 일부의 주장이 결코 역사학계의 정설은 아니라는 점이다.

몇 가지만 살펴본다면,

1. 민족대표33인인 대부분 변절자인가?
그렇지 않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은 최린, 박희도, 정춘수 세 명인데 그외 남강 이승훈선생을 비롯한 29인은 대부분 계속된 독립운동과 활동으로 죽거나 투옥되었다.

2. '태화관'은 룸살롱이었고 그 마담이 손병희의 셋째부인이었던 주옥경인가?
먼저는 주옥경이라는 인물이 손병희의 부인인 것은 맞지만 주옥경이 당시 태화관의 마담은 아니었고, 태화관을 고급음식점이나 술집이라고 한다면 모르거니와 '룸살롱'이라는 자극적 표현을 사용한것은 온당하지 않다.

3. 그들이 총감부에 신고하고 체포된 일과 3후 총감부에 자진 투항하였는가?
이 일로 수많은 학생과 청년들의 죽음을 수수방관하였고 심지어는 선언서 나부랭이 읽고 술판을 벌이고 조선의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까지 주장하지만 이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그들이 총감부에 신고하고 체포된 일과 3.1운동 시작 전과 후의 일들에 대해 연구된 논문이 적지 않다.

4. 민족대표33인은 3.1운동에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기여한 바가 정말 없는가?
좀 더 적극적이지 못한 부분을 비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없었어도 운동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설명은 올바르지 않다.
민족대표33인 대부분은 당시 일본이 사법현실에 비추어 징역 1년 6월에서 3년 가량의 비교적 꽤 높은 형을 받았다. 그들의 역할이 미미하였다면 일제가 그런 형량을 부과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사법처리를 염려했다면 33인은 애초에 그 자리에 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 현재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르지 않다는 점에서 20세기 초의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위세를 고려할 때 일제하에서의 독립운동의 한계와 그럼에도 3.1운동이 가지는 역사성과 의미, 그리고 민족대표들이 소극적으로 움직였다고 하여 그들의 기여도를 낮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유학자(유림)이며 대표적 독립투사로서 활동하고, 옥고로 인해 하반신 불구가 되었고 외세에 협조할 수 없다며 광복이후 미군정의 고문역할 요청을 거절하였던 김창숙 선생의 회고록 <벽옹 73년 회상기>만 보더라도 당시의 유림으로서 민족대표33인에 끼지 못한 것을 심히 부끄러워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본래 조선이 유교의 나라였는데 '독립선언서'에 유림들 가운데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음에 대한 자괴감이었다.
만일 설민석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족대표 33인이 시시하고 3.1운동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한다면 김창숙과 같이 대쪽같은 선비가 그들을 그렇게까지 부러워하였을까? 그리고 33인의 행동을 따라 유림들의 중지를 모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유림단 사건'을 실행에 옮겼을까?

3.1운동은 민족대표 33인과 일반 시민대중들, 모두가 주인공인 역사적인 사건으로 더 살펴볼 것도 없다.
문제는 이와 관련한 기사에 나타나는 비슷한 투의 수많은 댓글들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설민석 강사가 없는 얘기 떠들만한 분도 아니고 다 근거가 있는 팩트니까 얘기한건데 후손들 뒤집어지는 거 보소~"와 같은 내용들이다.
설민석이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다, 뭐 이런 글이다.
이 부분이 가장 우려스럽다.

역사, 철학이란 영역이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대 소위 '재미없는 학문'으로 읽히다보니 '역사대중화'를 위해 재미를 추구하는 설민석 방식의 긍정적인 면을 무시할 수는 없을지라도 도가 지나친 왜곡과 희화화는 지양해야할 것이다.

역사는 그리 가벼이 다룰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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